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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리노의 말 속 의학, 물리학, 철학

by inf3222 2026. 1. 6.

영화 토리노의 말 속 의학, 물리학, 철학
영화 토리노의 말 속 의학, 물리학, 철학

 

벨라 타르의 영화 **〈토리노의 말〉**은 서사적으로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작품처럼 보인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노동, 말의 침묵, 감자와 물, 바람과 어둠.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단조로움 속에서 인간의 몸, 자연의 법칙, 그리고 존재의 의미가 어떻게 동시에 붕괴하는지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이 작품은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에게 매달려 울었다는 일화에서 출발하지만, 니체의 사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니체 이후의 세계, 즉 의미가 소진된 이후의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의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 신체의 쇠락, 물리학적 관점에서 드러나는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고갈, 그리고 철학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실존의 무의미와 침묵을 동시에 호출한다. **〈토리노의 말〉**은 감정에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사고를 점진적으로 마비시키며 세계 그 자체를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 글은 이 작품을 의학, 물리학, 철학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영화가 단순한 예술 영화가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급진적인 보고서임을 밝히고자 한다.

 

 

의학적 시선: 몸은 왜 이렇게 천천히 무너지는가

〈토리노의 말〉에서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의지를 실행하는 도구가 아니다. 노인은 절뚝이며 걷고, 딸은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 감정의 표정을 잃어간다. 이들의 신체는 급성 질환이나 외상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 오히려 만성 피로, 영양 결핍, 반복된 노동이 축적되며 서서히 기능을 상실한다. 이는 현대 의학이 말하는 퇴행성 질환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영화 속 식사는 거의 감자 하나로 제한되며, 수분 섭취도 최소화되어 있다. 이러한 식단은 생존은 가능하지만 회복은 불가능한 상태를 만든다. 의학적으로 볼 때 이는 ‘유지 단계의 생존’이지 ‘회복 단계의 생명’이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의 신체적 쇠약이 병리적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원도, 치료도, 진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의료 시스템 이전의 세계라기보다, 의료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계에 가깝다. 말이 먹기를 거부하는 장면 또한 단순한 동물의 반항이 아니라, 생명 유지 본능 자체가 중단되는 생리적 사건처럼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 의학은 치유의 학문이 아니라, 신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의미 없이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관찰 도구가 된다.

 

 

물리학적 세계관: 에너지가 사라진 우주의 초상

〈토리노의 말〉의 세계는 물리학적으로 극도로 흥미롭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지만, 그 바람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풍차는 돌지 않고, 이동은 없으며, 모든 운동은 헛된 소모로 끝난다. 이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전달의 실패 상태와 유사하다. 에너지는 존재하지만 유의미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는 곧 엔트로피의 극대화 상태를 암시한다. 영화는 점점 어두워지고, 결국 빛마저 사라진다. 이는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우주가 열적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리학에서 열적 죽음이란 모든 에너지가 균질화되어 더 이상 일(work)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화 속 세계는 정확히 그 상태에 놓여 있다. 물은 더 이상 길어 올려지지 않고, 불은 켜지지 않으며, 움직임은 멈춘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폭발이나 붕괴가 아니라 ‘정지’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세계의 종말이 반드시 극적인 사건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물리 법칙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무의미뿐이다. 이 영화는 물리학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연약한 에너지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철학적 해석: 의미가 사라진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는가

〈토리노의 말〉은 철학적으로 철저히 반니힐리즘적이면서도, 동시에 니힐리즘 이후의 세계를 상상한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초인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초인도, 새로운 가치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반복과 침묵만이 남아 있다. 인물들은 질문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으며, 저항하지도 않는다. 이는 사르트르적 실존주의의 선택과 책임의 윤리와도 다르다. 이 세계에서 선택은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일 일어난다. 옷을 입고, 감자를 삶고, 바람을 견딘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의미 이전의 삶이다. 언어와 개념이 붕괴된 이후에도 생명은 관성처럼 지속된다. 이 영화는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은 언제까지 유지되는가’를 묻는다. 이는 존재론적 질문이자, 윤리적 질문이다.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도 돌봄은 지속되고, 노동은 반복된다. 딸이 아버지를 돌보는 행위는 어떤 도덕적 명령 때문이 아니라, 세계에 남아 있는 마지막 질서처럼 보인다. 〈토리노의 말〉은 철학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이미지와 시간으로 존재의 한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토리노의 말〉은 감상이나 해석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견딤을 요구하는 영화다. 이 작품은 의학적으로는 신체의 퇴행을, 물리학적으로는 에너지의 소진을, 철학적으로는 의미의 붕괴를 동시에 기록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벨라 타르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그 세계 안에 가둔 채, 빛을 끄고 침묵을 남긴다. 이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상태이며, 메시지가 아니라 조건이다. 그렇기에 〈토리노의 말〉은 예술 작품인 동시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냉정한 보고서 중 하나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