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랑콜리아〉는 흔히 ‘우울증에 대한 영화’ 혹은 ‘행성 충돌로 인한 종말 영화’로 분류되지만, 이러한 설명은 영화의 표면만을 스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축해 온 시스템들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문명 보고서에 가깝다. 영화 속에서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는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기술, 제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을 가시화하는 장치다. 이때 공학, 의학, 법은 인간 사회가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대표적인 장치로 등장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결혼식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질서와 축복, 계약과 규범이 응축된 이 공간에서 이미 균열은 발생한다. 주인공 저스틴은 그 모든 절차 속에서 기능하지 못하고, 언니 클레어와 주변 인물들은 이 ‘이상’을 정상화하려 애쓴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개인을 수용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계를 지탱한다고 믿어온 것들은 정말 믿을 만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멜랑콜리아〉를 공학, 의학, 법이라는 세 가지 학문적·제도적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이 영화가 왜 단순한 종말 서사가 아니라 근대 문명의 한계를 해부하는 텍스트인지 밝히고자 한다. 이는 감정의 해석이 아니라, 구조의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공학의 관점: 계산된 세계와 통제의 붕괴
공학은 인간이 세계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학문이다. 〈멜랑콜리아〉에서 이 믿음은 행성 궤도 계산과 천문학적 데이터로 상징된다. 클레어의 남편 존은 과학과 수치에 대한 신뢰를 통해 불안을 억제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스쳐 지나갈 것이라는 계산 결과를 반복해서 확인하며, 기술적 합리성이 공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공학적 사고의 전형이다. 불확실성은 더 정밀한 계산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확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계산은 맞을 수도 있지만, 계산을 신뢰하는 태도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존은 기술이 실패했을 때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공학이 약속했던 안정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가장 먼저 붕괴한다. 이는 기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공학을 비난하지 않지만, 공학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의학의 관점: 우울, 병리, 그리고 정상성의 전도
〈멜랑콜리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도는 의학적 관점에서 발생한다. 영화 초반, 저스틴은 명백한 우울증 환자로 보인다. 그녀는 일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회적 역할에 실패하며, 스스로를 병든 존재로 인식한다. 반면 클레어는 ‘정상’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행성 멜랑콜리아가 가까워질수록 이 구도는 완전히 뒤집힌다. 공포에 잠식되는 것은 클레어이며, 저스틴은 오히려 차분해진다. 이는 우울증을 단순한 결함이나 병리로 보는 관점에 대한 강력한 질문이다. 영화는 저스틴의 우울이 현실을 왜곡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의학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 조건에 의존한다. 종말 앞에서 ‘정상’이라는 개념은 무너지고, 저스틴의 상태는 병이 아니라 적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의학이 인간의 고통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의미까지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법학의 관점: 계약, 제도, 그리고 무의미해지는 규범
법은 인간 사회의 지속성을 전제로 작동하는 제도다. 결혼식은 그 법적·제도적 상징의 집약체다. 〈멜랑콜리아〉의 초반부에서 펼쳐지는 결혼식 장면은 규범과 계약, 역할이 얼마나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쉽게 공허해질 수 있는지도 드러낸다. 저스틴이 결혼식 절차를 이탈하는 순간, 법적·사회적 계약은 그 의미를 잃는다. 행성 충돌이라는 절대적 사건 앞에서 법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재산권도, 가족 제도도, 책임과 의무도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법은 ‘내일’이 존재한다는 가정 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를 과장 없이 보여준다. 누구도 법을 어기려 하지 않지만, 법을 지킬 이유 또한 사라진다. 마지막에 저스틴이 선택하는 행동은 법적 판단의 영역을 벗어나 있으며, 그 순간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법은 인간을 보호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만든 이야기인가?” 〈멜랑콜리아〉는 우울과 종말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인간 문명이 의존해 온 공학, 의학, 법이라는 시스템이 어디까지 유효한지를 묻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세계는 무너지지만, 무너지는 것은 행성만이 아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설명, 치료, 규범의 언어 역시 함께 붕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절망만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가장 솔직한 태도로 세계를 마주한다. 그래서 〈멜랑콜리아〉는 불편하지만, 지극히 정직한 문명 비평의 기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