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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바이어던 지정학, 철학, 지리학

by inf3222 2025. 12. 31.

영화 리바이어던 지정학, 철학, 지리학
영화 리바이어던 지정학, 철학, 지리학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의 영화 **『레비아탄(Leviathan)』**은 표면적으로는 한 러시아 남성이 자신의 집과 삶을 지키기 위해 지방 권력과 싸우다 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를 개인의 비극으로만 읽는 순간, 작품이 지닌 가장 중요한 층위를 놓치게 된다. 『레비아탄』은 특정 인물의 실패담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라는 국가가 어떤 구조와 논리로 작동하는지를 해부한 정치적·철학적 지도에 가깝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압도하는지를 냉혹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거대한 정치 담론을 일상적 공간 속에 배치한다는 점이다. 법정, 관청, 교회, 가정, 술집이라는 평범한 장소들은 모두 하나의 권력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은 그 안에서 선택의 여지를 거의 갖지 못한다. 『레비아탄』은 국가 권력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장면보다, 이미 폭력이 전제된 일상의 풍경을 더 많이 보여준다. 이 점에서 영화는 정치 스릴러가 아니라, 체제의 공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관객은 분노하기보다, 점점 숨 막히는 감각 속에서 이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이 영화는 지리적 공간을 단순한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황량한 북러시아의 해안,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폐허 같은 풍경은 인물의 심리와 국가의 구조를 동시에 상징한다. 『레비아탄』에서 땅과 바다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존재한다. 이 영화는 묻는다. 인간은 과연 이 거대한 구조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삼켜진 존재인가.

 

 

지정학적 권력의 축소판으로서의 지방 도시

『레비아탄』의 지정학적 핵심은 “중앙 권력은 어떻게 가장 말단의 개인까지 도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영화의 배경은 러시아 북부의 외딴 해안 도시로, 국제 정치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진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주변부가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장, 경찰, 법원, 교회는 서로 분리된 기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해관계로 촘촘히 엮여 있다. 이 구조 속에서 개인의 재산권과 권리는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언제든지 무력화될 수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정학은 국경 간 갈등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권력 흐름이다. 중앙 정부의 논리는 지방 권력자에게 위임되고, 그 위임은 다시 개인의 삶을 압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주인공 콜랴가 집을 빼앗기는 과정은 단순한 부패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법정에서 판결문이 기계적으로 낭독되는 장면은, 정의가 실종된 상태에서도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구조는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레비아탄』은 특정 국가를 고발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현대 국가 일반의 지정학적 속성을 드러낸다. 주변부의 개인은 언제나 중앙의 결정을 감당해야 하며, 그 결정의 이유나 정당성을 요구할 권리를 거의 갖지 못한다. 영화 속 외딴 도시는 세계 정치의 축소판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반복되는 권력의 패턴을 연상시킨다.

 

 

홉스의 괴물, 신의 언어를 빌린 국가의 철학

『레비아탄』이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철학적 핵심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토머스 홉스가 말한 레비아탄은 인간의 폭력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레비아탄은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폭력이 된 국가다. 이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안정성을 유지한다. 영화는 이 역설을 감정 없이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종교의 역할이다. 『레비아탄』에서 교회는 국가 권력과 분리된 윤리적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언어를 제공한다. 성직자의 설교는 개인의 고통을 초월적 질서의 일부로 포장하며, 순응을 미덕으로 제시한다. 이 장면들은 신이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대신 국가의 논리를 강화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철학적으로 이는 세속 권력과 초월 권력이 결합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 붕괴를 보여준다. 영화는 명시적인 철학적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실패, 무력한 분노,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정의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이토록 쉽게 시스템에 굴복하는가, 그리고 그 시스템은 왜 항상 자신을 ‘불가피한 질서’로 포장하는가. 『레비아탄』은 희망을 제시하지 않지만, 냉정한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영화의 철학은 위로가 아니라, 직시다.

 

 

황량한 지리, 탈출 불가능한 공간의 의미

『레비아탄』에서 지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북러시아의 해안은 아름답지만 냉혹하며, 광활하지만 인간에게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는다. 바다는 자유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것은 오히려 탈출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가능성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인식된다. 이 지리적 조건은 인물들의 심리 상태와 정확히 맞물린다. 특히 폐허가 된 고래의 뼈는 영화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다. 한때 거대한 존재였던 생명체의 잔해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은 이 거대한 구조 앞에서 이미 소모된 존재이며,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무관심하고, 국가는 자연처럼 거대하고 무심하다. 이 이중의 무관심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고립된다. 영화 속 공간들은 대부분 폐쇄적이다. 집, 법정, 교회, 술집은 모두 탈출구 없는 구조로 묘사된다. 외부로 나가도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이 반복되는 공간 구성은 지리가 곧 운명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레비아탄』은 말한다. 어떤 공간에서는 선택 자체가 허구가 되며, 지리적 위치는 정치적 위치가 된다. 이 영화의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