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는 제목과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라기보다, 아름다움이 과잉 소비된 사회에 대한 피로한 보고서에 가깝다. 로마라는 도시가 지닌 압도적인 역사성과 시각적 장엄함 속에서, 주인공 젭 감바르델라는 끝없는 파티와 담론, 예술과 권력의 중심을 배회하지만 어떤 충만함도 얻지 못한다. 이 영화는 개인의 우울이나 노년의 회한에 머물지 않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적 구조, 예술의 공허한 제도화, 그리고 물질과 쾌락이 인간의 감각과 사고를 어떻게 변질시키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특히 사회과학적 관점에서는 상류 문화 계층의 네트워크와 상징 자본이 어떻게 공허한 재생산을 반복하는지를 보여주고, 예술학적으로는 ‘예술처럼 보이는 것’과 ‘예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여기에 화학적 은유까지 더해지며, 영화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하나의 반응 과정처럼 소모되고 잔존물만 남는 세계를 묘사한다. 〈그레이트 뷰티〉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영화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영화다.
사회과학: 네트워크 사회와 공허한 문화 엘리트
〈그레이트 뷰티〉의 인물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작가, 예술가, 정치인, 성직자, 귀족의 후손까지 이들은 로마의 문화 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 그러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집단은 생산 집단이 아니라 순환 집단에 가깝다. 새로운 가치나 담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미 정당화된 언어와 취향을 반복하며 서로를 승인한다. 파티는 끊임없이 열리지만, 그곳에서 오가는 대화는 의미 있는 소통이라기보다 사회적 지위 확인 의식에 가깝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 자본의 자기 복제 구조를 연상시킨다. 젭은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내부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는 비판자이자 공범이며, 관찰자이자 참여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는 몰락 직전의 사회가 아니라, 이미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관성으로 유지되는 사회다. 개인의 공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결과이며, 아름다움조차 사회적 소비재로 전락한 이후의 풍경이다. 〈그레이트 뷰티〉는 상류 사회를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왜 더 이상 의미를 생산할 수 없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예술학: 예술은 왜 이렇게 피곤해졌는가
영화 속 예술은 언제나 과장되고 선언적이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는 벽에 머리를 박고, 작가는 도덕을 설교하며, 사진가는 피사체보다 자기 개념을 먼저 설명한다. 이 장면들은 현대 예술의 전위성을 풍자하는 동시에, 예술이 제도화되는 순간 잃어버리는 생명력을 드러낸다. 예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아방가르드의 역설이다.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던 예술은 제도 안으로 편입되면서 또 하나의 규범이 된다. 젭이 젊은 시절 단 한 권의 소설로 명성을 얻은 뒤 더 이상 쓰지 않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는 이미 ‘작가’라는 위치를 획득했기에,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영화는 예술의 죽음을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이 왜 삶과 분리되었는지를 묻는다. 아름다운 장면들은 넘쳐나지만, 그 아름다움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시각적 과잉이 감각의 마비로 이어진 현대 예술 환경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레이트 뷰티〉에서 진정한 예술은 전시회나 무대가 아니라, 말없이 지나가는 노인의 얼굴이나, 오래된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발견된다. 예술은 설명될 때 사라지고, 체험될 때만 잠시 살아난다.
화학: 욕망과 감정은 어떻게 소모되는가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화학을 다루지 않지만, 그 구조는 놀라울 만큼 화학 반응과 닮아 있다. 파티, 술, 음악, 조명, 사람들의 웃음은 모두 반응물처럼 끊임없이 투입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새로운 생성물이 아니라, 피로와 무기력이라는 잔여물이다. 이는 촉매만 많고 에너지 효율은 극도로 낮은 반응을 연상시킨다. 젭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자극이 그의 주변을 맴돌지만, 감정적 활성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된 자극은 내성을 만들고, 감각은 둔화된다. 화학적으로 보면 이는 과잉 반응 이후의 안정 상태에 가깝다.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 즉 평형에 도달한 시스템이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억과 회상의 장면은 이 평형을 깨는 미약한 반응처럼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완전한 전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소렌티노는 인간의 삶을 하나의 반응식처럼 바라본다. 젊음, 욕망, 명성은 빠르게 반응하지만, 그 부산물은 공허와 침묵이다. 이 화학적 세계관 속에서 ‘위대한 아름다움’이란 새로운 물질이 아니라, 반응이 멈춘 자리에서 잠시 드러나는 잔광에 가깝다. 〈그레이트 뷰티〉는 감상적인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사회과학적으로는 엘리트 문화의 자기 소진을, 예술학적으로는 제도화된 예술의 피로를, 화학적 은유를 통해서는 인간 감정의 반응 한계를 보여준다. 젭 감바르델라는 구원받지 않지만, 완전히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 아름다움이 넘쳐나지만 더 이상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시대, 의미가 과잉 생산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시대.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정교하게 기록한 하나의 보고서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가 여전히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이미지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 반응하지 않은 어떤 가능성 때문인가. 〈그레이트 뷰티〉는 그 질문을 남긴 채, 로마의 밤처럼 조용히 사라진다.